경주볼거리 '명당' <선덕여왕의 릉>

이민석 기자 | 2018.11.13 19:41

 <선덕여왕의 릉>

선덕여왕은 신라 제26대 왕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신라 제27대 왕이 되었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덕만이며 호는 성조황고이고 시호는 선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32년에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국인들이 장녀인 그에게 성조황고란 호를 올리며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형제로는 천명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는 천명과 덕만을 자매관계로 전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선덕을 장녀로 전하는 데 반해, 『화랑세기』는 천명을 장녀로 전하고 있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의 용모를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는 것과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지녔다고 전하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이 선덕의 언니로 되어 있다.

진평왕 재임시 적자가 없어 용춘의 형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하지만 천명은 용수의 동생인 용춘을 보다 사랑하였고, 결국 용춘이 천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명의 동생 선덕이 성장하면서 용봉의 자태와 태양을 위용을 보이자, 진평왕은 그에게 더욱 마음이 가서 천명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선덕에게 양보하게 하였고, 이에 천명이 출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용춘은 진평왕의 명으로 선덕을 받들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선덕이 즉위 후에 삼서의 제도에 의해서, 을제공과 흠반공이 선덕을 모셨지만 이들 또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645년에 당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공격하니, 선덕여왕이 군사 3만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틈을 노려 신라 서쪽의 7성을 빼앗았다.

647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만에 왕이 죽고, 흉조라 일컬어지는 유성이 월성 쪽으로 떨어지는 등 불길한 일이 생겼지만, 김춘추와 김유신의 계략으로 이를 진압했다.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만에 죽었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 지냈다. 선덕여왕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후 진평왕의 친동생 진안갈문왕과 월명사이에 태어난 딸인 승만이 신라 제28대 왕에 오르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낭산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여 그 뒤에 거기에 장사지냈다. 

과연, 여왕을 장사지낸 지 10여 년 후인 문무왕 때 능 밑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서 말한 바 사천왕 위가 도리천이라는 가르침을 실증한 것이 되어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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